여주 신륵사 .......... 111126.
신륵사 ......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 때 원효가 지었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나옹화상이 오면서 크게 번창하였고, 성종 3년(1472)부터는 대규모로 확장시켰다.
성종 4년에는 절의 이름을 ‘보은사’라 하였다.
절 이름을 '신륵'이라 한 것은 미륵 또는 나옹이 신기한 굴레로 말을 막았다는 설과
고려시대에 마을에 나타난 사나운 말을 인당대사가 신의 힘으로 제압했다하여 마을 사람들이 신륵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 * 보수중인 '극락보전'
신륵사 극락보전..... 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으로 경내에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숙종 4년(1678)에 지어진 후 정조 21년(1797)에 수리되기 시작해서 정조 24년에 완공되었다.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다.
내부에는 불단 위에 나무로 만든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위에 화려한 닫집이 꾸며져 있다.
또한 영조 49년(1773)에 제작한 범종과 후불탱화가 있다.
극락보전의 정문 위에는 나옹이 직접 쓴 것이라고 전해오는 ‘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입체감 있게 쓰여져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신륵사 극락보전은 조선 후기에 대대적으로 수리되었으나 부분적으로 조선 중기의 수법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조선 전기의 석탑. 보물 제225호. 높이 300cm.
이 석탑은 2층의 기단부 위에 다층의 탑신부가 있어 기본적인 구조는 신라나 고려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각 부재의 세부조형은 전혀 다르다.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탑은 기단에서 탑신에 이르는 각 부재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지복석(地覆石) 위에 복련(伏蓮)이 조각된 하층 기단부가 있으며,
그 중석(中石)에는 화형(花形)으로 장식된 우주(隅柱)가 있고 그 사이에는 파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갑석(甲石)은 상하에 앙련(仰蓮)과 복련이 있고 중간에 넓게 돌출된 띠가 있다.
상층 기단부의 중석 역시 화형의 우주가 있고 그 사이에 운룡(雲龍)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상층 갑석에는 복련만 새겨져 있다.
탑신부는 체감률이 완만하며 옥신석(屋身石)은 옥개석(屋蓋石)의 두께와 비슷할 정도로 낮다.
옥신석의 각 면에 우주가 있고 옥개석은 수평에 가까워 낙수면도 완만하며 합각 부분에서 매우 약한 반전(反轉)이 있을 뿐이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고 철제 찰주만 남아 있다.
현재 8층의 옥개석 위에는 작아진 옥개석과 옥신석이 1개씩 남아 있어 더 많은 층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륵사의 목어 ......
목어는 길이가 237㎝이다. 몸에는 지느러미와 비늘을 선명하게 표현하였고 입에는 여의주(如意珠)가 물려있다. 조선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 전탑. 보물 제226호. 높이 940cm.
한강변에 있는 암벽 위에 건립된 것으로, 지대석 위에 화강석으로 된 7층의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높은 6층의 탑신부가 있다.
기단 위에 탑신부의 받침을 마련한 것은 신라시대의 전탑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탑신부는 6층 부분만 높이와 너비가 급격히 줄어들었을 뿐 각 층의 체감률이 낮아 전체적으로 고준(高俊)해 보인다.
각 층의 옥개(屋蓋)는 옥신(屋身)에 비해서 극히 간략화되어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전(塼)으로 된 노반(露盤) 위에 화강석으로 된 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 등이 얹혀 있다.
탑 북쪽에 있는 이 탑의 수리비에 "崇禎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이라고 씌어 있어서
1726년(영조 2)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전탑이다.
신륵사 대장각기비 ......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이다..
강월헌 .......
나옹화상의 화장터에 건립된 석탑과 인접해 건립된 6각형의 정자이다.
강월헌은 나옹화상의 당호로 그를 추념하기 위해 건립했던 정자로 생각된다.
이 정자는 본래 석탑과 거의 붙어 있었으나. 1972년 대 홍수시 파괴되는 바람에 현재의 위치에 콘크리트로 건립했다.
이 정자는 신륵사를 감아 흐르는 여강의 암반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백사장과 강물 그리고 멀리 보이는 여주평야 등은 가히 일품이라 하겠다.
신륵사 삼층석탑 ......
다층전탑 인근의 강변 암반에 건립되어 있는 단층기단을 구비한 평면방형의 3층 석탑이다.
넓은 1매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의 외곽에는 높은 1단의 각형 받침을 마련한 후 중앙에 호각형 2단의 받침을 조출해 기단을 놓았다.
기단은 1매의 석재로 조성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와 탱주를 모각했다.
갑석 역시 1매의 석재로 놓았는데, 각 면 3구씩 그리고 모서리에 1구씩 모두 복엽 16판의 복련을 조식했다.
중앙에는 낮고 높은 각형 2단의 받침을 조출해 탑신부를 놓았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석으로 조성되었다.
매 층 탑신석에는 양 우주가 모각되었는데, 1층탑신은 2층에 비해 3배 정도 높게 조성되었다.
현재 3층 탑신석은 결실되었다. 옥개석은 3층 모두 잔존하고 있다.
낙수면의 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해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하면에는 1·2층은 각형 3단, 3층은 각형 2단의 받침이,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받침이 조출되었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다. 이상과 같은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